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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위해 목숨걸다…인류사 빛낸 '위대한' 여성


▲‘아밀리아 에어하트’는 여성 비행사 최초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다(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위해 목숨을 건 도전을 해온 여성이 있다.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아밀리아 에어하트’와 방사성 원소에 일생을 바친 ‘마리 퀴리’다.


하늘의 별이 되다, ‘아밀리아 에어하트’


아밀리아 에어하트는 지난 1897년 7월 24일 미국 캔자스주 앳친슨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모험심이 강했던 그녀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토론토의 스패디나 육군 병원에서 간호사로 봉사했다.


의학 공부를 위해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중퇴했다. 그리고 1921년 1월 3일 여성 파일럿이었던 네타 스누크로부터 첫 비행 훈련을 받았다. 6개월 뒤에 에어하트는 ‘카나리아’라고 별명을 붙인 황색 중고 복엽기 키너 에어스터를 구매했다.


에어하트는 여성 파일럿 최초로 1922년 10월 22일에 에어스터로 고도 4,300m 비행 성공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23년 5월 15일 국제항공연맹에 의해 여성으로는 16번째로 파일럿 면허증을 땄다.


이후 에어하트는 1928년 4월 힐튼 H. 레일리 대령의 제안으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다. 에어하트는 이후에도 2차 대서양 횡단 등에 성공하며 여성의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하늘에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아밀리아 에어하트는 그녀가 사랑하던 하늘을 날다 생을 마감했다.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 비행을 도전하던 중 남태평양에서 실종됐다.


에어하트의 실종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겨졌다. 실종과 관련해서는 지금도 많은 조사가 이루어질 만큼 ‘인류 비행사’에 에어하트가 남긴 족적과 영향이 크다.




▲‘마리’와 ‘피에르’는 가난 속에서도 끝없이 연구를 이어갔다(사진=Ⓒ위키미디어 커먼즈)

사랑에 중독되다, ‘마리 퀴리’


‘퀴리 부인’이란 위인전 제목으로 익숙한 인물 마리 퀴리는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원래 마리 퀴리의 이름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라였다.


어린 시절부터 우수한 성적을 받으며 지성을 빛냈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폴란드에선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다. 마리는 언니와 함께 학비를 모아 파리로 떠났다. 이후 소르본 대학에 입학했고 물리학, 화학, 수학 등을 공부했다.


생활비조차 부족한 어려운 형편에도 마리는 공부를 놓지 않았다. 힘든 공부를 이어가던 중 마리는 과학자였던 피에르 퀴리를 만났다. 과학에 대한 열정과 인류애를 공유한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후 부부는 함께 우라늄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결국 지난 1898년 두 사람은 이전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다. 암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 물질은 마리가 ‘라듐’이라 이름 붙였다.


마리와 피에르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11년엔 라듐 화합물 연구로 노벨 화학상까지 수상했다. 마리는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자 노벨상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인물로 기록됐다.


1906년 피에르가 마차 사고로 죽고 홀로 자녀들을 돌보며 가난한 생활을 이어가던 와중에도 마리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마리 퀴리는 평생을 연구에 몸 바쳤지만, 결국 그 연구에 잠식돼 죽음을 맞이했다.


마리 퀴리는 꾸준한 연구를 위해 라듐을 주머니에 대강 넣고 다닐 정도로 자신의 연구를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속된 방사능 연구 탓에 방사선 피폭이 심해졌고 악성 빈혈 등에 시달렸다. 마리는 결국 말년에 요양원을 전전했다. 그리고 1934년 7월 4일 향년 66세로 사망했다.


‘아밀리아 에어하트’와 ‘마리 퀴리’의 일생은 화려했지만, 결국 일견 ‘슬픈’ 죽음으로 끝났다. 그러나 누구도 두 사람의 죽음을 헛되다고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이 사랑하던 분야에 몰두하던 이들이었다. 두 사람의 도전은 아름다웠고 인류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인류는 오래도록 두 사람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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