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회귀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가장 마지막에 쓴 필립 말로 시리즈다. 그의 걸작인 기나긴 이별이나 빅슬립에 가려져 인기가 없는 편이지만 필립 말로의 매력이 여전히 살아있는 작품이다. 필립 말로는 LA에서 일하는 사립 탐정으로 어느날 어떤 여자를 미행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여자를 미행하면서 말로는 그녀와 가까워진다. 그녀를 귀찮게 하는 남자가 죽게 되면서 이야기는 미궁으로 빠져들게 된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일본의 유명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영웅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한 추리 소설 작가다. 대실해밋과 더불어 하드보일드 장르의 대부로 군림했던 그는 중년의 나이에 단편을 쓰기 시작해 장편 소설 빅슬립과 기나긴 이별 등으로 이름을 얻었다. 빅슬립은 유명 미남 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필립 말로 역을 연기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매니아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명작이다.
그의 작품은 국내에도 여러번 번역 소개 되면서 적잖은 매니아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필립 말로의 마지막 사건을 다룬 원점회귀 - 플레이백만은 평가 절하되는 분위기가 있다. 예를 들어 필립 말로가 여자를 미행하면서 모텔 옆방을 잡아 청진기를 통해 대화를 엿듣는 장면이 있다. 남의 이야기를 쪼잔한 수단을 통해서 엿듣는 필립 말로는 이전 시리즈에서 고결한 기사의 모습을 보여줬던 것에 비하면 캐릭터성 파괴라는 것이다. 또 전편들에 비해 나이가 든 필립 말로는 이번 작품에서 2번이나 여자와 관계를 가지기도 한다. 결벽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만 매진했던 사립탐정의 모습에서 벗어나 많은 독자들이 실망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립 말로는 이 작품에서도 도시를 쥐락펴락하는 거물이나 경찰서장 앞에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자신만의 이상을 지키려고 한다. 미행하던 여자가 거액의 돈을 쥐어주자 최소한의 경비만을 남기고 돌려줄 정도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전편에서 헤어졌던 린다 로링과 재결합하게 되는 필립 말로의 모습은 비참한 삶에서도 자존심을 챙기려는 남자의 일면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 전개가 단순하고 분량이 짧아서 독자가 혼란을 느낄만한 부분은 없는 편이다. 여느 하드보일드 소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팜므파탈에 의해 유혹을 받지만 곧 회복하고 사건의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필립 말로는 자신만의 직업 윤리에 충실하다. 그는 푼돈에 의해 움직이는 사립탐정이지만 '비열한 거리'에 물들지는 않는 것이다. '비열한 거리'란 레이먼드 챈들러의 추리 소설 작법서인 심플 아트 오브 머더에 나오는 한 구절에서 유래한 단어다. 필립 말로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챈들러는 "여기 이 비열한 거리를 지나가야만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으며 물들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라고 지칭한 바 있다.
이 문구가 설명하는 필립 말로의 모습은 중세의 기사가 현대 미국 LA에 강림한 것처럼 고결한 이상을 위해 투쟁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환경은 비열하며 인간들은 타락했고 여자들은 자존심을 버린지 오래다. 필립 말로가 추구하는 이상은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사건을 원활하게 처리하여 정의가 구현되도록 하는 일이다. 그는 자신을 정의의 사도라고 자처하지는 않지만 독자에게 그는 순수한 이상가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을 끝으로 레이먼드 챈들러는 4챕터만을 쓴 유작 '푸들 스프링스'를 제외하면 거의 창작 활동을 하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뒤를 따라 죽고 만다. 챈들러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상의 아내가 죽자 실의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데 이런 로맨티스트적인 모습이 필립 말로의 캐릭터에도 그대로 살아있다. 국내에는 최근 레이먼드 챈들러 단편선이 출간되고 빅슬립이 재번역되는 등 관련된 소설 시장이 더 넓어지는 느낌이다. 특히 이번에 재번역된 챈들러의 작품에는 하루키의 해설이 붙어있는 것이 특색이다. 하루키가 어떻게 자신의 문장을 완성했고 소설의 중심을 잡게 되었는지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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