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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김훈

평형추, 듀나


(출처=알라딘)

듀나의 평형추는 다소 자기 복제적인 느낌이 나는 장편 소설이다. 소설의 중심에는 근미래의 기술로 만들어진 궤도엘리베이터가 있다. 이 엘리베이터를 세운 그룹의 회장은 죽은 상태이고, 화자의 시야에 들어온 인물에게 인격이 전이된 듯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듀나의 과거 소설들에서 써먹었던 요소들이 적당히 합쳐진 듯한 기분이 든다. 결말 부분에서 AI와 결합하는 인격이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윌리엄 깁슨의 고전 뉴로맨서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야기는 다소 불친절하고 적당한 액션과 두뇌싸움이 벌어진다. 듀나는 인물들간의 관계도를 그려내는 것이 아이디어 중심의 SF를 쓰는 것보다 더 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거품처럼 가상 신분을 통해 나타나고 적당히 쓰여지다가 버려진다.


듀나의 SF가 독보적인 점이 하나 있다면 중심인물이 한국인이라는 것밖에는 없다. 사실 우리는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세계의 지배자가 되는 SF를 많이 봐왔기에 한국인이 SF 소설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서 국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수없는 가면 중 하나를 선택해서 쓴다.


궤도엘리베이터가 세워진 외딴 섬의 원주민 이야기도 섞여들어가지만 지구온난화로 인해 침수당하는 태평양 섬나라의 이야기처럼 그려진다. 이들은 이야기에 필요한 적당한 테러를 일으키다가 이야기의 뒷면으로 사라진다. 독자가 집중해야 할 스토리 라인은 결국 그룹의 회장이 정말로 자신의 친척인 여자를 사랑했을까인지 아니면 우주로 향하는 받침대가 되는 궤도 엘리베이터 개발의 비화인지 아리송하다.


정세랑은 표지 뒷면에서 듀나를 AI로 만들어서 소설을 쓰게 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듀나는 AI처럼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그녀의 소설은 지난 20년간 큰 기복없이 지면화되었고 딱히 중요한 과학상의 발전이 적용되지도 않았다. 최근의 AI 붐을 적당히 반영한 것 말고는.


때문에 어째서 듀나가 소설가로서의 이력보다 영화평론가로서 더 유명한지 독자는 알게 된다. 그녀의 소설은 발전이 없다. 소설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딱히 어떤 궤도를 통해서 변화해나간다는 느낌이 없다. 그녀는 마치 무균실에서 컴퓨터 하나만 가지고 인터넷을 떠돌며, 가끔 영화와 K-컬처의 부산물들을 감상하며 소설을 쓰는 것 같다. 그녀의 소설에는 인간애가 결여 되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심한 악담일까. 하지만 나로서는 솔직한 감상이다. 듀나의 소설을 쭉 읽어왔고 또 앞으로도 읽어나갈 독자로서 그녀의 소설은 SF로서 기본기를 갖춘 양산품일 뿐이다. 그 이상에 도달하는 듀나를 언젠가는 보고 싶다. 그것보다는 궤도 엘리베이터가 실용화되길 기다리는 게 더 빠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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