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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김훈

[미니시리즈] 극한퇴근 ⑫ - 3호선은 구파발행과 대화행 사이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다음 날, 시내버스를 다시 도전하면서 이번에는 절대 압구정을 지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버스는 생각보다 빨리 왔고 덕분에 압구정역에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참고로 압구정역은 3호선 오른쪽 아래, 즉 남동쪽에 있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일산을 사는 내가 살면서 굳이 갈 일이 없다는 뜻 되겠다. 하지만 강남으로 이직한 이상, 압구정역을 자주 이용할 수 밖에 없으며 3호선으로 집에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보통 3호선 하행선은 구파발행과 대화행 두 노선으로 나뉜다.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구파발행을 타더라도 얼마든지 집에 편하게 갈 수 있겠지만 일산에 사는 사람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만약 울며 겨자 먹기로 구파발행을 타게 되면 일단 구파발까지는 안전하게 갈 수 있다. 하지만 구파발에서 내리고 나면 대화행 열차가 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하철을 두 번이나 타야 할 뿐더러 지하철이 상당히 느리기 때문에 답답함을 두 번 겪어야 한다. 따라서 웬만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화행 지하철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 불행 중 다행인 사실이 있다면 구파발행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껏 살면서 구파발행을 울며 겨자먹기로 타야 하는 ‘웬만한 경우’를 딱 한 번 겪어본 적이 있다. 대학교 1학년 때 무슨 바람인지 밴드부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여름 정기공연을 혜화에 있던 라이브 카페에서 했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제는 ‘공연을 했다’는 사실만 기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저녁 6시가 넘어서 공연이 시작했고 끝나고 나니 8시가 넘어 있었다.


참고로 일산에서 혜화는 약 한 시간 반이 걸리며 우리 집처럼 지하철역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면 두 시간이 걸린다. 즉, 공연이 끝나자마자 집에 들어가도 밤 10시가 넘는다. 당시 나는 사회의 맛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밤 10시 넘어서 집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서울에 있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 중에는 우리 학교 밴드부와 연합을 맺은 다른 학교의 밴드부들이 와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정신을 차려보니 모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뒤풀이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옛날부터 시끄러운 장소를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뒤풀이는 값싼 술과 자극적인 맛의 안주가 있는 포차에서 진행됐다. 이러다간 집에 가기는커녕 차가 먼저 끊길 것 같아서 아홉 시 반이 될 무렵, 술을 마시는 등 마는 등 하다가 조용히 탈출했다.


꽤 늦은 시간에 홀로 4호선에 몸을 싣고 가다가 3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충무로에서 환승을 했는데 그 때 남아있던 차가 바로 구파발행이었다. 게다가 다음 차는 언제 올 지 기약도 없는 상태였다. 만약 그 차를 탄다면 늦은 시간에 구파발행에서 하염없이 차를 기다려야 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구파발에서 차를 다시 한 번 타게 된다면 집에 늦게 들어가는 구실을 주는 셈이 되기도 했다. 결국 그 날, 집에 들어가니 열두 시가 넘었지만 차가 오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서 잘 빠져나갈 수 있었다.




어쨌든 압구정역에 도착한 나는 다시 한 번 결정을 해야 했다. 대화행을 타고 집까지 가야할지, 아니면 아무 차나 타되 바로 다음 역인 옥수역에서 내려야 할지. 인생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으로 이어진다지만, 이런 사소한 것까지 선택을 잘 해야 한다니. 퇴근하는 수단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출근만 생각하고 덜컥 강남으로 이직한 과거의 나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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